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비 마립간 (문단 편집) == 생애 == [[눌지 마립간]]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실성 마립간]]의 딸 [[차로부인]]이다. [[자비]](사랑하고 불쌍히 여김)와 [[한자]]까지 같아서 눌지 마립간이 노렸거나 [[고구려]]의 제2대 [[유리명왕]]과 같이 실제 이름은 한자가 달랐는데 발음이 비슷하고 뜻이 좋은 [[글자]]를 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본래 신라는 지속적으로 [[사위]]가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자주 보여왔고, 이 때문에 왕위 계승이 복잡하게 꼬여서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지만 자비 마립간부터는 눌지 마립간에 의해 확립된 부자 [[상속]]제에 따라 큰 다툼없이 즉위했다. 461년 2월에는 [[왕비]] 김씨와 [[혼인]]했는데 이 때 김씨는 왕의 숙부인 [[미사흔]]의 딸로 추정되며, 사촌과 혼인한 것이 된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파호 갈문왕의 딸과 혼인했는데 파호 갈문왕은 대체적으로 [[복호(신라)|복호]]로 여겨지며 복호 역시 자비 마립간의 숙부이다. 여러모로 [[내물 마립간]]계 왕위 계승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요소로 서로 간의 혼인을 통한 결합을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 눌지 마립간 시대에 [[고구려]] 및 [[왜]]에 대한 적대 노선을 명확히 정했기에 자비 마립간의 재위기에는 유독 고구려와 왜의 침략이 잦았다. 즉위 2년차인 459년 4월에 왜가 100여 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이끌고 신라의 동쪽 변경을 습격했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동해]]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탓에 금방 [[경주 월성]]이 포위당했다. 이후 왕성을 굳게 지키며 [[병력]]을 내보내 싸우게 하자 왜가 북쪽 [[바다]]로 도망갔는데 자비 마립간은 이를 추격했고 이때 왜인들 중 물에 빠져죽은 자가 반이 넘었다고 한다. 462년 5월 왜군이 활개성을 침입하여 신라군이 패배해 1,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463년 2월에 왜가 남쪽 삽량성(歃良城, 오늘날 [[경상남도]] [[양산시]])으로 침입했지만 벌지(伐智)와 덕지(德智) 두 [[장군]]에게 군사를 주고 [[복병]]을 숨겨두어 기습 공격을 해 승리를 거두었는데 두 장군은 473년 각각 [[좌장군]]과 [[우장군]]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지속적인 공격이 와서 변경 두 곳에 성을 쌓았고, 463년 7월에는 군대를 순시했다고 한다. 467년에는 [[전함]]의 수리를 명령해 전통적으로 신라의 약점이었던 [[수군]]을 보강했다. 신라인은 왜군에 비해 [[해전]]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언급이 《삼국사기》에 자주 등장하는데 당장 자비 마립간 재위기에도 [[왜구]]가 여러 번 침략했을 정도이니 신라에 수군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468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말갈]]병 10,000명과 함께 신라 북쪽 변경의 실직성(오늘날 [[강원도]] [[삼척시]])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 루트는 동해안가를 따라 남진해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공격하는 경로다. 장수왕의 신라 공격은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일본서기]]》에서 찾을 수 있는 사건에서 기인한 걸로 보인다. 《일본서기》 464년 기록에 의하면 >'신라 왕이 집안의 [[수탉]]을 잡아죽이게 했다.' 는 이상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때 신라 왕은 자비 마립간이다. 일국의 왕이 닭 1마리 잡은 게 기록될 리는 만무하고 이는 [[암호]]로 봐야하는데 고구려인들이 쓰고 다니던 절풍모자를 수탉의 볏으로 보아[* 고구려인들은 양쪽에 새의 [[깃털]]을 꽂은 [[모자]]를 쓰고 다녔다.] 자비 마립간이 경주에 주둔한 고구려군을 습격해 섬멸한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는 해석이 중론이다. 자비 마립간은 처음부터 반고구려 노선을 정하고, 고구려 주둔군을 몰살시키는 것으로 고구려에 대한 예속을 끊는다는 선언을 분명히 했으며 장수왕은 이에 대한 보복에다 차후 [[백제]] 공세 때 후방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언제든지 서라벌을 노릴 수 있는 실직성을 빼앗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때 백제의 [[개로왕]]은 신라의 지원군을 빌릴 수 있다는 상황에 자신감이 생겼는지 469년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광개토대왕]] 이후 처음으로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475년 고구려의 대규모 백제 침공 때 개로왕의 친동생 부여문주가 원군을 요청하러 신라에 왔고, [[나제동맹]]에 따라 개로왕을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했으나 신라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서울특별시|한성]]은 함락당하고, 개로왕은 전장 한복판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다만 신라 지원군은 수도를 잃은 백제를 지원해 남하하는 고구려군을 차단했고, 결국 돈좌시켜 백제의 완전 멸망을 막는 데 성공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비 마립간은 [[전성기]]를 맞은 강대한 고구려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아직 약한 신라가 할 수 있는 건 축성만이 답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 같은데 이 때부터 성을 쌓는 기록이 대폭 늘어나기 때문이다. 훗날 고구려도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에 철벽 [[수비]]로 대항했듯 [[대포]]가 발달하기 전까지 국력차를 상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수성전]]이었다. 국경 최전방이었던 [[죽령]], [[조령]], [[동해안]] 경로를 중심으로 지금의 [[충청도]]와 [[경상도]] 각지에 여러 [[산성]]을 쌓았으며, 고구려 [[기병]]의 성을 건너뛰는 [[기습]] 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는지 자비 마립간 본인도 475년 서라벌 인근 명활산의 [[명활성]]에 [[궁전]]을 옮겨 살았다고 한다. 474년 개로왕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 전해졌을테고 고구려 앞에 신라도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국]]에 성들을 만들면서 이를 바탕으로 변방 지역에 대한 지배권도 확립했고, [[수도권]]과 [[지방(지리)|지방]]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지방에서 이주해온 [[주민]]들에 의해 서라벌의 인구가 늘어나 469년 수도의 행정 구역을 조정하기도 했다. 476년 6월과 477년 5월에도 왜의 침략이 있었으나 모두 물리쳤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인지 《삼국사기》기록의 절반이 축성 관련 이야기다. 지금도 [[크고 아름다운]] 자태가 남아있는 [[삼년산성]]이 축성된 것도 이 왕의 재위기간이다. 물론 이 시기는 백제 정도만 나제동맹 덕분에 사이가 좋았지 북•동•남 세 방향으로 고구려와 왜의 침공에 계속 시달렸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방책이었지만 자비 마립간 치세에 쌓인 성들은 뒷날 신라가 [[진흥왕]] 때 영토를 확장할 때나 [[삼국통일전쟁]] 때 백제에게 공격당할 때에도 큰 역할을 수행했다. 자비 마립간 최고의 작품인 이 [[방어]] 라인은 소지 마립간, [[지증왕]] 등의 개축과 보완을 거쳐 [[난공불락]]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다만 이렇게 대백제 전선에 축성했던 성들이 약 450년 후에 [[후백제]]에게 넘어가 거꾸로 신라를 겨누는 가장 무서운 칼이 되고 말았던 건 웃지 못할 일.[* 근데 그마저도 결코 후백제가 군사력으로 함락했던 게 아니었다. [[견훤]]이 이 어려운 방어막을 어떻게 해서 수중에 넣었는지는 상황이 불분명하여, [[김헌창]]처럼 설득, 회유, 협박으로 판도에 편입했을 개연성만 있을 뿐. [[고려]]의 [[태조(고려)|왕건]] 또한 후백제와의 쟁패 과정에서 자비 마립간~지증왕이 축성했던 방어 라인만은 자력으로 뚫어내지 못했다.][* 물론 4세기 반에 가까운 먼 [[미래]] 일까지 그의 실책이라고 볼 순 없다. 이건 [[후백제]]가 [[통일신라]]의 군사적 자산을 [[후삼국시대]] 신라보다도 더욱 많이 계승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 [[463년]] 2월 변경 두 곳에 성을 쌓았다. * [[468년]] 9월 하슬라에 거주중인 15세 이상의 사람을 징발해 니하에 성을 쌓았다. * [[470년]] '''[[삼년산성]]을 쌓았다.''' * [[471년]] 2월 모로성을 쌓았다.[* 확실하지 않으나 지금의 [[군위]] [[효령면]]로 추정된다.] * [[473년]] 7월 [[명활성]]을 보수했다. * [[474년]] 일모성, 사시성, 광석성, 답달성, 구례성, 좌라성 등을 쌓았다. 즉위 12년(469년)에는 서라벌을 지역적으로 구분하여 방리명(坊里名)을 확정해 서라벌을 기존의 [[부족]] 연합적 성격에서 행정적 성격으로 바꾸었다. [[왕릉]]은 문헌상 비정되는 곳은 없으나,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된 [[황남대총]] 북분이 왕비가 아니라 왕인 자비의 왕릉이라는 설이 있다.[[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90832.html|#]][[http://www.whabaeg.com/news/articleView.html?idxno=342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